●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보물 제405호)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동양일보]충청북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석탑 31기가 유존되고 있다. 그 중에서 신라석탑은 5기, 조선시대 석탑이 1기가 있으며 나머지 25기 모두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신라석탑으로 편년된 제천 장락동의 석탑은 점판암재의 모전석탑이기 때문에, 순백의 화강암재 신라석탑은 4기 정도이다.

규모는 중앙탑으로 전칭되는 충주 탑평리 7층석탑이 가장 높고 큰데 이와 같이 웅장한 규모의 석탑은 왕경인 경주지역에서도 찾을 수 없는 대형석탑 이다.

이 석탑은 남한강변에 높게 축조된 토단위에 7층으로 가구되었는데, 이 탑은 사찰의 가람배치에 따라서 건립된 것이 아니라 충주지역이 고구려의 국원성, 신라의 중원경이 설치되었던 역사·지리적인 환경과 관련되어 건탑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석탑은 600년대 중엽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삼국통합의 영주였던 문무왕 재세시절에 설계·착공된 경주 감은사지 3층 석탑에서 전형양식의 석탑이 완성된다.

경주 감은사지와 삼층석탑
경주 감은사지와 삼층석탑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이후 우리나라 전역에서 건립된 수많은 석탑들의 기본모델로 자리하게 된다. 한국석탑의 전형양식이란 2중의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린 것을 말 하는데, 이것은 문무왕의 평생염원이었던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정신에서 창안되었다고 하겠다. 여기서의 삼한은 삼국을 의미한다.

신라 30대 국왕의 시호를 왜 문무왕으로 추존하였을까?

우리나라 역대왕조에서 시호를 문무(文武)로 했던 것은 신라 30대 법민이 유일하며, 전무후무한 예 가되고 있다. 그의 업적 중에서 삼국통일이라는 영토적 또는 군사적 부분에 비중을 두었다면 무왕(武王)으로 하면 되는데 굳이 문과 무라는 쌍 전의 시호를 준 것은 그의 업적을 문화적 통합에 더 많은 비중을 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적 통합이란 백제양식의 석탑과 신라의 모전양식의 석탑을 융합하여 ‘한국적석탑’을 창안한데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삼국사기> 문무왕 21년 조와 <삼국유사> 왕력 문무왕조에 의하면 왕은 생전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죽어서는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불국토인 신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넣으라는 유언을 남긴다.

신라 때는 동해구(東海口)로 불렸던 현재의 감포 앞바다에 위치한 대왕암은 왕의 유언에 따라 조형된 세계 초유의 해중능(수중능)이다. 이러한 왕의 은혜에 감읍하여 신라인들이 만든 감은사(感恩寺)와 금당아래의 용혈, 쌍 탑인 삼층석탑과 대왕암은 문무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이다.

그 후 8세기중엽에 조성된 석굴암의 본존불 시선도 정확하게 대왕암을 직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불타의 원력으로 동해의 용이 되었을 문무왕을 보호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위대한 건축물이자 석굴사원의 정수라고 하겠다.

또한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였던 만파식적이라는 피리와, 한국범종에만 장식되어 세계적으로 “조선종”이라는 특별한 학술명을 받고 있는 범종위의 음통은 만파식적을 형상화 한 것으로 모두 문무왕과 관련된 조형물이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화화수장(火化水葬)의 길을 갔던 지도자와 애국충정으로 뭉쳐진 신라인들의 국민적 화합은, 작은 나라 신라가 역사상 최초의 영토, 국민, 문화적 통일을 달성하는 내면적 저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한국석탑이 충북에도 있는데 바로 단양군 가곡면 남한강변의 향산리의 폐사지에 위치한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원위치인데다가 전체적인 체감비율과 균형미로 볼 때 왕경지역의 어느 석탑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가장 완벽한 신라석탑이라고 하겠다.

석탑 주변에는 기와편과 도자기편이 널려 있어 일대가 절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찰에 대한 명칭이나 연혁 등을 말해주는 자료는 알려진 바 없는데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이곳에 향산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는 단양 향산리사지 삼층석탑 출토 금동보살좌상이 소장되어있는데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이 석탑이 처음 건립된 이후 고려시대에 중수과정에서 이 금동보살좌상을 사리구에 봉납한 것으로 추정 된다.

단양 향산리사지 삼층석탑
단양 향산리사지 삼층석탑

향산리사지 삼층석탑은 2층과 3층 옥개석의 전각부가 약간 파손되었을 뿐 그 외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기단부는 여려 매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였다.

하층기단의 면석은 4매의 판석으로 조립되었는데 각 면 양쪽에는 우주가 모각되었고, 중앙에는 탱주 1주가 모각되었다. 상층기단은 한 면에 2매씩 모두 8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다. 상층기단도 하층기단과 마찬가지로 각 면 양쪽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1탱주가 모각되었다.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의 상면에는 2단의 받침대가 조출되어있다.

탑신부는 모두 3층으로 이루어졌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의 석재로 조성되었는데, 탑신석의 양쪽에 우주가 모각 되어있다. 1층 탑신석의 남쪽 면에만 문을 상징한 문비(門扉)장식이 표현되어있다.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4단의 옥개받침이 있으며, 옥개석 윗부분에는 2단의 받침대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반전이 심하지 않고 비교적 편평한 편이지만 곡선을 이루면서 유려하게 뻗어있다.

1층 탑식석에 비해서 2층과 3층의 탑식석의 높이는 적절하게 체감되어 안정감이 느껴진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보륜, 보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각각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향산리 삼층석탑은 한국석탑 발달사에서 제 2기에 해당하는 전형양식의 석탑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기단부와 탑신부의 결구방식이나 형식적으로 처리된 부분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할 때, 이 석탑은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 무렵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산리 삼층석탑은 충청북도에서 흔치 않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데, 근래에 알려진 영춘면의 비마라사지와 대강면에 소재한 석실사원인 보국사지를 연계하여 단양지역의 불교문화의 흐름과 성과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비마라사지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의상대사의 전교10찰중의 한 곳으로 한국불교사연구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사찰이다.

단양 보국사지 석조여래입상
단양 보국사지 석조여래입상

 

보국사지의 석실사원과 장육상 조성, 비마라사의 창건, 향산리 석탑 등으로 볼 때, 단양지역에는 신라시대 왕경의 격조 높은 불교문화가 전래 되어 지역의 불교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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