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고구려비 (국보 제205호) ②

 충주 고구려비 탁본_故 정영호 박사(1979년)
 충주 고구려비 탁본_故 정영호 박사(1979년)

 

[동양일보]충주 고구려비는 1971년도에 발견된 공주 무령왕릉과 더불어 해방이후에 발견된 가장 큰 고고학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앞선 1편에서 고구려비의 첫 발견과정을 담았다면, 이번 편에서는 고구려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경위를 밝히고자 한다.

1979년 4월 5일 아침에 필자의 은사이신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물관장의 전화를 받았다. 당일 동국대학교 황수영 박사와 일본인 학자들이 충주에 가니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분들은 전년도(1978년)에 발견된 충주 봉황리 마애불에 대한 조사를 목적으로 충북을 방문한 불교미술전공자들이었다. 예성동호회에서는 기왕에 학자들이 오셨으니 마애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비석을 보여드리고 자문을 구하고자 했다.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일행은 마애불로 가기 전 먼저 입석마을에 들려 비석을 실견하였고, 황 박사와 고베대학의 모리, 큐슈대학의 다나까 교수는 마애불상군을 조사하러 갔고 정영호선생 일행은 입석에 대한 탁본작업을 진행하였다.

탁본이 완료될 무렵 마애불에 다녀온 일인학자들과 합류하여 충주시내 충인동에 소재한 山다방으로 갔다. 정 박사가 가져온 탁본을 병풍에 걸치고 살펴보는 중에 황 박사는 이 비의 중요성을 간파한 듯 “나는 혈압이 있어 흥분하면 안 되는데…”하시며 거듭 차를 주문하여 일행들을 긴장시켰다. 황 박사는 이 비를 진흥대왕의 순수비로 추정했다. 비문의 첫머리를 ‘五月中眞興大王(오월중진흥대왕)’으로 판독하고 이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 비석은 당초부터 高麗大王(고려대왕)을 眞興大王(진흥대왕)으로 판독할 만큼 마멸이 심한 상태였다. 이틀 후인 4월 7일 오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입석마을에 도착했다. 정영호관장의 지휘로 비석에 더운 물을 부어가면서 나무젓가락과 칫솔 등을 이용하여 조심스럽게 비석 전체에 덮인 이끼와 청태 등을 제거했다.

다음날인 8일에도 불순물제거작업과 병행해 탁본을 했고, 완료된 탁본을 방안의 벽면에 걸어놓고 여러 학자들이 한 글자 한 획씩 판독에 들어갔다. 한 필획을 놓고도 여러 이견들이 있었지만 참석자들의 합의가 도출된 문자를 방안지에 기록하는 난해한 작업이 아침부터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도 비석의 국적은 물론 정체성을 특정하지 못하였다. 그만큼 마멸이 심한 원인도 있지만 ‘전부대사자, 하위발사자, 대형’ 등 고구려의 관직명과 ‘신라토내당주, 신라토내모인삼백, 신라매금’ 등 상대편에서 신라를 지칭하는 문구들로 판독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신라 진흥왕의 비석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학자들은 혼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제액 부분 3차원 스캐닝(동북아역사재단)
제액 부분 3차원 스캐닝(동북아역사재단)

 

판독이 진행되는 동안 밖에 있던 주민들이 “서울에서 대학자들은 안 오고 소학자들만 와서 해석을 못 하는 거 아니냐?”는 수근거림이 들리기도 하였다. 오후 3시경 뒤늦게 도착한 건국대 김광수 교수는 석문이 진행되는 방안으로 들어오기 전 문턱에서 벽에 걸린 탁본을 보면서 그게 왜 진흥대왕이야 고려대왕이지? 하는 한마디의 말로, 오전·오후 내내 풀리지 않아 고민하던 조사단들은 일제히 “아! 아!”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긴장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돌덩어리가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비로 탄생되는 역사적이고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김 교수는 조사단의 버스에 동승하지 못하고 뒤늦게 도착했기에 진흥대왕 또는 신라비석이라는 선입견이 없었으므로 첫 글자를 ‘고려대왕’으로 일순간에 판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후 4시반 경, 조사단의 정영호 관장은 “이 비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을 기념하기 위해 고구려의 국원성이였던 충주에 세운 고구려의 비석”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이후 4월 22일, 단국대 박물관에서는 학계의 원로교수들과 전문가를 고구려비 현장으로 초빙해 석문작업과 각기의 의견을 수렴했다.

결과, 이 비는 한국 유일의 고구려비로 장수왕대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고 합의되었다.

같은 해 6월 9일, 단국대학교박물관이 주최한 중원고구려비학술회의에서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문에 보이는 년 간기를 비교 유추하며 건비연대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열띤 토론을 진행하였고, 이러한 성과는 단국대학교 〈사학지〉 13호로 발간되었다.

그 후 중원고구려비 발견 20주년을 맞아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에서 비석의 새로운 구명(究明)을 위한 국제학술회대회를 2000년 10월 13~14일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하였다. 이에 앞서 같은 해 2월 22~26일까지 4박5일 동안 충주에서 고구려비의 새로운 해석을 위한 신석문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50여명의 금석문 연구자와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여, 20여자를 새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석문과정은 탁본과 흑백, 컬러 그리고 적외선촬영을 병행하여 한 글자를 4가지 방식으로 검토하였다. 중원고구려비는 우리나라 석조문화재 조사에서 적외선촬영이 시도된 첫 사례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연구성과는 그 해 12월 〈고구려연구〉 10호로 간행되었다.

충주고구려비는 발견 당시부터 마모가 심하여 내용 전체를 확인하기가 불가한 상태이지만, 발견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중·일 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그동안 많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었다.

작년 2019년은 충주 고구려비 발견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주관하여 과거의 석문과정보다 한층 발달된 과학적인 방법을 응용하여 석문작업과 입비연대의 추정을 위한 노력을 진행하여 그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금년에 발간할 예정이다.

한편 고구려비는 발견 당시의 위치로 부터 북쪽으로 약 40여m 이격된 장소에 옮겨서 세웠다. 이러한 조치는 고구려비의 조사과정에서 입석마을의 여러 古老들이 비석이 오래전부터 대장간 모퉁이의 돌기둥으로 사용되었다는 한결같은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증언을 토대로현위치 대한 시굴조사를 하였는데 조사결과, 슬래그와 목탄재 등 철물주조에 관련된 자료들이 출토되므로 옛 대장간부지로 판단되었다. 이와 같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지금의 위치로 비를 이전하고 목조보호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석과 인접한 도로에서 발생되는 진동과 소음 등 공해요소가 증가되고, 목조보호각의 창살 틈새로 들이치는 산성비와 조류의 배설물에 의해 비석의 마모가 급속하게 진행되자 문화재청의 실내보존 의결에 따라 목조보호각을 철거하고 2012년 7월 현재의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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