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 박사

 

이충호 박사

[동양일보]●재일조선인에 대한 관리와 교육의 구조

­교육과 법적 지위에서의 분단(2)



일본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협정 영주권의 취득자와 미취득자로 선별하는 조처를 즉각 취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국적’에 의한 분단의 제도화다.

1965년 10월에 한국은 국적이 있는 것이지만, 조선은 단순한 용어에 불가하다는 ‘정부 통일 견해’를 내고, 그때까지 양자를 모두 용어라고 했던 견해를 부정했다.

그것과 동시에 조선국적에서 한국국적으로 변경은 인정하지만, 역으로 한국적에서 조선적으로의 변경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곧 국적을 가진 조선인과 국적을 갖지 않은 조선인을 재일조선인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기본 방침이었다.

이 조처 후, 두 번째가 1966년 1월 17일의 ‘협정 발효의 날’부터 5년을 기한으로 나누어서 한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의 협정영주권의 신청을 개시했다. 1970년 8월 말 신청자는 약 21만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1971년 1월 16일의 마감 날에는 약 35만 명의 신청자를 헤아리게 되었다.

여기에는 한일 양국 정부와 일부 재일조선인 단체에 의한 상식을 벗어난 작업이었다. 한국적을 갖고, 일본에 영주할 것인가 어떨 것인가 하는 재일조선인 각자의 삶의 방식의 근본에 관계된 중대한 문제를 강권 적으로 시간을 한정하여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이로 인해 재일조선인의 부자, 형제, 친척 사이에 깊은 고뇌와 갈등이 초래되었고 가족까지 갈라서는 사태가 나타났다.

그 뿐 아니라, 세 번째로 일본 정부는 이들 신청자에 대해서 재류 경력이 양호하게 거주했는가, 않았는가의 기준에 의해서 그 과거를 엄격하게 심사해서 영주권 취득 적격자와 부적격자를 가려냈다.

그 결과 1970년 8월 현재 신청자 21만 중에 17만4000명, 또 1971년 1월 신청 마감 후 총계 35만에 달한 신청자 중에 21만 6000명이 영주권 취득을 허락받았고(71년 5월 현재), 그 후에 심사는 계속되었다.

이에 부적격자로 판정된 자는 재류 자격이 더욱 불안정한 특별 재류 자로 바뀌어 버렸다. 이 심사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취득자의 재류 경력을 장악함과 함께 부적격자를 특재(特在)로 몰아넣는 것에 의해 그 생살여탈(生殺與奪)의 권한을 입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협정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강제로 취득자와 미취득자로 나누어졌다. 미취득자는 다시 신청하였으나, 부적격자로 된 자와 신청하지 않은 조선인 국적의 재일조선인으로 나뉘었는데, 후자가 다수를 점하였다. 일본 정부는 부적격자(특별재류자)가 된 재일조선인을 대상으로 1968년부터 출입국 (관리)법안을 제출하여 그들의 통제의 구조를 표명하였다.



3. 한일 체제하의 재일조선인 교육

-외국인 학교 법안과 일본의 교육 운동



●비판적 주체의 성장(1)

1965년은 한일 기본 조약과 여러 가지 협정을 둘러싼 시비가 직접적인 쟁점으로 부상한 해였다고 한다면, 그다음 해인 1966년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법적 지위 협정’의 구체화를 축으로 해서 새로운 정책과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한일 조약을 둘러싼 대결은 재일조선인 문제로 그 쟁점을 옮겨 계속 이어져 갔다.

1966년에 접어들자, 정부는 한편으로는 협정 영주권의 신청을 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학교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한 운동 측에서는 외국인 학교 법안을 저지하는데 열심이었지만, 영주권 신청이 내포한 문제성에 관해서는 일부 법률 전문가 단체를 제외하고 간과해 버리는 경향이 컸다.

재일조선인 사회의 분단은 그로부터 5년간 일본국민의 눈에서는 벗어난 채 행정적·실무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정책을 제기하는 방법론적 차이와 관련이 있었다.

즉, 한편에서는 신 법안으로써 국회에 제출되었기 때문에 정치 문제화되기 쉬운 성격을 갖고 있은 데 반해 다른 한편은 행정적 차원에서 실무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당사자 이외에는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또한, 한쪽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시(敵視)→조선인 학교 규제라는 의도를 드러내어 문제의 소재가 명확했던 데 대해서, 다른 한편은 법적 지위·협정 영주권 등 일본국민이 이해하기에는 새로운 이해의 노력을 요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 문제가 다소 소원하게 느껴졌다.

총괄적으로 보아 이러한 차이는 ‘법적 지위 협정’에 대한 일본국민의 파악 방식에 기복이 있었음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결과 일본국민의 눈에는 ‘법적 지위 협정’의 구체화한 두 가지 중에서 외국인 학교 법안에 집중하게 되었다. 동시에 외국인 학교 법안의 대상인 조선인 학교의 실상에 눈을 돌리게 되어 일본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관심을 끌어모았다.

여기에 몰린 큰 관심은 1966년, 1967년, 1968년 3차례에 걸쳐 외국인 학교 법안이 계속 제출된 데 따른 사회현상으로 대두되었다. 분명 조선인 학교 문제는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그것은 모두 정부와 재일조선인 사이의 문제로 처리되었다.

일본국민은 자신이 ‘당사자’라는 의식을 갖고 이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집중한 적이 없었고, 설사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도 그 범위는 소규모로 그쳤다. 그러나 외국인 학교 법안이 제출되자 조선인 학교 문제는 국정 차원의 문제로서 일본의 국론을 둘로 가르는 정치적 쟁점에까지 부상하였다.

이번과 같이 초점의 대상이 된 것은 재일조선인 교육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외국인 학교 법안이 대결 법안이 되었고, 당시의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이 법안이 내용상 ‘반일 교육’ 취급=조선인 학교 규제에 기초를 두었고, 형식상 종래의 통달 행정에서 법률에 따른 단속을 목표로 하여 국회에 상정한 것과 관련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문제로써 받아들이고, 반격을 가한 일본 국민의 운동역량 성장이야말로 이 법안을 대결 법안으로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총련에 의한 민족 권리 옹호 운동은 그 당사자로 법안의 억압적 성격을 부각해서 그 반동 성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68년부터는 재일한국청년동맹 등도 항의 활동을 전개하여, 재일조선인은 총체적으로 이 법안에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해 한일 양국 민중이 ‘각기 서 있는 위치에서 공동의 적을 공격’하는 객관적인 연대 역량이 이 법안을 정치과제로 부상시켜 결국 폐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문제의 중심 무대는 일본의 국회이기 때문에 일본국민의 분투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확실히 한일회담에 대한 일본국민의 비판적인 관심은 정부 간의 교섭 진전에 비해 뒤늦게 발생하였다. 한일 교섭은 1951년에 개시되었지만, 1960년의 안보투쟁 이전에는 ‘국민운동으로서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하다다시게오(畑田重夫), ‘일한회담반대투쟁(日韓會談反對鬪爭)의 전개와 그 역사적 역할’ <일본과 조선>1965년 수록) 정치적 과제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치적 과제로 보이기 시작한 안보투쟁 후의 대중운동도 1961년에는 ‘정폭법(正暴法) 분쇄’가 주안점이었다. 1962년 가을부터 1963년 겨울에 걸쳐서 ‘한일회담’의 타결의 분위기를 타서 일시에 이것이 주제로 부상되었으나, 1963년 가을에는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기항(寄港) 반대로 다시 그 과제가 옮아 가버렸다.

국민이 직접 피해를 보는 문제는 잘 보이지만, 다른 나라 특히 조선에 가해하는 문제는 남의 문제로서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관 직무집행법(警職法)과 같은 문제는 ‘무서운 경찰 반대’라는 말로 1분만 이야기하면 되고, 보안 문제는 3시간만 투자하면 알아듣게 할 수 있었지마는, 한일 문제는 3일이 걸려도, 3주가 걸려도 이해시키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였다.(하다다게시게오(畑田重夫), 앞의 논문)

오히려 그사이에 한일 교섭을 중단시킨 힘은 1960년에 이승만 정권을 내몰아 내고, 1963년에 박정희 정권을 위기에 빠뜨린 남한의 학생·민중의 투쟁이었다.(4·19)

이 투쟁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라는 위기의 본질을 고발하였다. 한일회담에 대한 대중운동이 한국에서 먼저 이루어진 것은 동일한 위기를 한국 측이 일본보다 더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전개된 것은 1964년 후반부터였고, 본격적으로는 1965년 봄에 가 조인이 이루어진 이후의 일이었다.

이는 교섭 내용이 결정·합의된 후에야 대중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한일회담 분쇄 투쟁은 자연적으로 한일 조약 무효화 투쟁이라는 면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운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활동가·지식인을 중심으로 하여 일본인의 한국관 왜곡이 문제로서 자각하기 시작한 점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1963년의 관동 대지진 40주년을 기회로 조선인 학살의 사실이 반성하는 차원에서 상기된 것은 그 하나의 지표로 들 수 있는 사례이다. 한일 관계 및 한국 근대사에 대한 학습 관심이 전문가 외에도 일반 일본인 사이에서도 서서히 확산되어 간 최초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대중화되는 과정을 보면, 먼저 한일회담을 ‘안보 체제의 일환’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인식이 형성되었다. 축적된 안보투쟁의 경험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한일회담 분쇄 투쟁과 연결해 ‘제2의 안보투쟁’으로 만들고자 한 일본의 대중운동 논리에서 본다면, 이는 필연적인 인식 방법이었다.

이에 대중운동은 우선 동북아시아 군사동맹 결성 반대를 부르짖고, ‘전쟁에 말려드는’ 위기를 호소하였다. 또한, 1965년 2월에는 베트남의 북폭(北爆)이 시작되자, 이것과 연결해서 침략전쟁 반대가 보다 중시된 것이었다.

이어서, 일본 독점자본의 경제 침략의 문제가 지적되었고, 세 번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부인·적시해서 남북 분단을 고정화하는 비판이 가해졌고, ‘전쟁과 침략과 분단’의 한일 조약 반대의 슬로건으로 정착해 갔다.

당시 일본의 이와 같은 운동이 한일 조약의 군사적 측면을 강조한 것은 한국 측의 운동이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다시 식민지화의 위험을 비난하고 있던 점에 비해, 그 주어진 입장의 차이를 여실히 나타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한국 문제에 대해서 한일회담의 본질을 파악하기보다는 미국의 아시아 침략·안보문제를 통해서 한일회담에 가깝게 접근한다고 하는 것이 일본의 대중운동에서 지배적인 이해방법이었다. 비록 이러한 시각에서도 한국이 일본국민의 시야로 들어온 것은 그들이 한국에 관한 관심의 문호를 열려고 하는 의미로 일보 전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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