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철 서원대학교 명예교수/전 한국지명학회 회장

청주목 지도(출처: 『광여도(廣輿圖)』; 18세기 중반[영조 13~영조 52년경]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지도)
청주목 지도(출처: 『광여도(廣輿圖)』; 18세기 중반[영조 13~영조 52년경]에 제작된 작자 미상의 지도)

 

[동양일보]지명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낸 어떤 고장이나 장소의 이름이다. 특정한 곳에 명칭을 부여할 때 자연지리적 실체의 특성을 고려하는 경우가 있고 사회문화적 가치 추구를 위한 경우도 있다. ‘민주광장’이나 ‘통일로’와 같은 지명은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와 ‘통일’에 대한염원을 담아 명명된 것으로 후자의 예이다. 그리고 ‘노루목’이나 ‘살여울’ 같은 명칭은 해당 지형이 노루의 목과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물살이 빠른 여울이라는 자연 지리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렇듯 지명은 어떤 지역의 특징적인 면모를 반영하였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자연이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명을 바탕으로 도시화로 인해 경관이 변해버린 지역의 옛 모습을 추정할 수도 있고,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의 생활상과 의식을 살필 수도 있다. 결국 지명은 변해버린 자연․지리와 사회․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보물창고인 것이다.

특히 지명은 언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그 언어가 소멸의 과정에 있을지라도 의연히 살아 옛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즉, 일상어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말들이 지명 속에는 살아남아 우리말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낭성의 ‘묵정리(墨井里)’라는 마을의 본래 이름은 ‘머그미’이고 ‘금천동(金川洞)’의 옛 이름은 ‘쇠내’ 또는 ‘새내개울’이라 하지만 1961년에 간행된 『청주지』를 통하여 ‘쇠미’라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머그미’와 ‘쇠미’는 ‘머그+미’와 ‘쇠+미’로 분석할 수 있고 후부요소 즉 속성지명이 ‘미’임을 알 수 있다. 순우리말 ‘미’를 ‘金川’에서는 ‘川’, ‘墨井’에서는 ‘井’으로 옮겼으므로 ‘물’과 관련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물을 뜻하는 ‘미’가 오늘날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가 없어 옛말을 공부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물과 관련된 뜻을 지닌 어휘로 ‘미끄럽다/매끄럽다’, ‘미역’, ‘미나리’ ‘미더덕’, ‘미날’ 등이 있다. 이들 단어에 들어있는 ‘미’가 ‘물’과 관련이 있음을 알고 나면 우리의 옛말에서 ‘물’을 ‘미’라고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물을 머금은 비탈길을 걷다가 넘어져본 사람이라면 물의 속성이 ‘미끄럽다’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손가락에 낀 반지가 빠지지 않을 때 물속에 손을 담근 후 시도하면 쉽게 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해 본 사람도 물의 속성 ‘매끄러움’을 인지할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물탕에 들어간 ‘미더덕’을 무심코 씹었다가 뜨거운 물만 튀어나와 입천장을 델 뻔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박병철(서원대학교 명예교수/전 한국지명학회 회장)
박병철(서원대학교 명예교수/전 한국지명학회 회장)

 

올해는 지난 겨울 이후 너무 가물어서 마늘, 양파, 오이…… 등 각종 노지 채소가 흉작이었다. 내 이웃에 사는 어떤 이는 마늘 한 접을 심어 수확도 겨우 한 접에 머물러 씨 값도 못 건질 뻔 했다며 허탈해했다. 기상 조건에 따라 작황이 달라지는 것이 채소 농사이거늘 ‘미나리’는 사시사철 물이 흘러들어가는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므로 그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채소 중 물에서 나는 것이 ‘미나리’이므로 어두의 ‘미’또한 물과 관련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국어에서 ‘미’는 단독으로 쓰이지 않지만 한 단어의 구성요소로 ‘미’가 일상어에서 쓰이고 있고 지명의 한 요소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칼[刀]’의 옛말 ‘갈’이 단독으로 쓰이지 않지만 칼과 같이 생긴 생선을 ‘갈치’라고 하고, ‘코[鼻]’의 옛말 ‘고’가 ‘골다’에 그 잔영을 남기고 있는 것과 같은 예이다. 어떤 단어의 소멸은 모든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세대를 달리하여 특정 지역에서부터 서서히 사라져 가지만 어딘가에는 그 흔적이 화석처럼 남아있다.

삼국시대의 국어를 검토해 보면 [水]를 뜻하는 말로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신라․백제어에서는 ‘믈>물’이라 하였고 북쪽에 자리 잡은 고구려어에서는 ‘매>미’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지역인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사천시(泗川市)’는 3세기초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이었다.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하여 본래의 이름 ‘사물현(泗勿縣)’을 757년(경덕왕 16)에 ‘사수현(泗水縣)’으로 개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순우리말 ‘믈>물(勿)’을 [水] 또는 [川]으로 한자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지역이었던 오늘날 경기도 ‘수원(水原)’의 명칭에 대하여는 본래 이름 ‘매홀(買忽)’을 경덕왕 개칭 지명으로 ‘수성(水城)’이라 하였음을 역시 『삼국사기』 지리지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어 ‘매>미(買)’는 [水]를 뜻함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언어의 중심지 또한 경주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水]’를 뜻하는 북방계의 고구려어 ‘매>미’는 남방계어 ‘믈>물’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주도권을 잡은 신라어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메>미’는 아직도 완전하게 소멸되지 않고 한때 고구려에 포함되었던 청주의 지명에까지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지명은 보수적인 언어를 담고 있는 보물창고이다.

지명이 옛말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용 미국의 50개 주 이름 중 상당수가 원주민의 언어인 아메리카인디언의 언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앵글로색슨족을 비롯한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이전에 부여된 ‘미시간(큰 물)’, ‘미시시피(물의 제왕)’, ‘아칸소(붉은 사람)’, ‘테네시(큰 굴곡의 덩굴)’, ‘아이오와(졸린 사람들)’, ‘켄사스(그라운드 부근의 산들바람)’, ‘일리노이(완벽한 인간)’, ‘켄터키(암흑과 유혈의 땅)’…… 등이 원주민의 언어로 된 주의 명칭이다. 이러한 현상은 뉴질랜드의 행정구역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뉴질랜드의 10개 주 명칭 중 ‘타라나키’와 ‘오타고’가 원주민의 언어인 마오리어 지명이다. 또한 기초자치단체라 할 수 있는 121개 카운티의 명칭 중 마오리어 지명이 68개로 전체의 56.2%에 이른다. 유럽식 지명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옛 말의 보물창고와 같은 지명을 통하여 사라져가는 청주의 언어를 발굴하는 일은 언어학자의 임무이다. 방언 즉 청주지역어를 가꾸어 나가는 일은 문화의 중앙 집권에서 벗어나 특색 있는 지역 문화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문화 창달을 위하여 지역의 언어뿐만이 아니라 문학,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와 대중의 발전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청주문화원을 비롯한 각 지역의 문화 관련 기관 단체들은 연구자들이 발굴한 합리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이를 실용화, 대중화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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