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소설가

박희팔 소설가

[동양일보]경복궁(景福宮)이란 ‘길이길이 큰 복을 누린다.’ 뜻이다.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탄생하면서 경복궁이 세워졌는데,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지경에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한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답다.’ 는 유교의 철학을 토대로 세워진 궁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1392년 7월)하고 1394년 12월에 개경에서 지금의 서울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불과 10개월만인 1395년에 완성을 본 것이다. 이 경복궁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 등이 둘러싸여 있으나 어느 때고 북악산과 인왕산을 볼 수 있도록 지었다. 이 궁에는 4대문이 있는데 그 제1문이 광화문이다.

이 광화문(光化門)은, 큰 덕을 온 나라에 비춘다. 는 뜻으로 즉 ‘어진 정치로 세상을 밝힌다.’는 것이다. 경복궁의 남쪽에 있다 해서 ‘남문’이라 했으며, 이 광화문이 경복궁의 정문의 역할을 하여 다른 궁의 문보다 크기도 하고 우아하기도 하다. ‘광화문’이란 이름은 세종8년(1426년)에 집현전 학사들이 경복궁의 문과 전각에 이름을 붙일 때 만들어졌다. 이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으나 고종3년(1865년)에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다시 세워졌다. 다시 일제강점기에 광화문을 헐어 북쪽으로 옮긴 것을 6,25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이를 1968년(박정희 대통령 때)에 복원했으나 본래와 달라 다시 2010년에 바로 잡아 지금의 광화문으로 되었다.

건춘문(建春門)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은 ‘봄을 세우는 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행에서 동쪽은 봄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로 세자나 동쪽의 궁에서 일보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이 건춘문 역시 경복궁 중건 당시 세워졌고, 봄은 새로운 만물이 싹튼다 했으니 왕이 될 세자가 있는 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지어 ‘동궁’이라 하기도 했다. 건춘문은 6.25 전의 내가 어렸을 적엔 지금의 국군통합병원을 당시는 의전병원이라 했는데 이 병원 바로 맞은편에 있다. 이 문의 상단에 입을 벌리고 있는 짐승들의 얼굴 조각들이 있어 그 입에 돌을 던져 넣으면 길조가 생긴다고 하여 건춘문 바닥의 돌을 주워 던져보나 그 좁은 입속으로 잘 들어가지 않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던져 어쩌다 들어가면 높은 톤으로 쾌재를 부르던 일이 생각난다. 하여 건춘문 상단에는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돌들이 수북이 쌓이곤 했다.

영추문(迎秋門)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문이다. ‘가을을 맞이하는 문’ 이란 뜻이다. 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뜻하기 때문이다. 경복궁 안에서 근무하던 신하들이 출입했다. 고종 때(1896년)에 고종이 궁녀가 탔던 가마를 타고 이 문을 통해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했던 일) 했던 안타까운 문이다.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쪽이 있는 문이다.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武勇)이란 뜻이기도 하고 또는 ’신령스러운 현무(玄武)의 뜻이기도 하다. 이 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적었으나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희맹제’에 왕이 참석할 때 이 문을 사용했다. 영조대왕은 육상궁(어머니 최씨를 모신 궁)에 참배하려 갈 때 이 문을 이용했다. 세종대왕 때 완성해서 1427년에 수리하고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에 타 없어졌다가 다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복원 했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던 것을 다시 197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청와대의 경호를 맡은 수도경비사령부가 있게 되면서 통제되었다가 2018년에 개방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렇듯 경복궁의 4대문을 기술했으나 그간 숱한 어려움을 겪은 경복궁이다. 내가 경복궁을 다시 찾은 것은 일제강점기에 세웠던 총독부 건물이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으로 쓰였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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