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먼 조상 적부터 떠나고 머문 기억이 유전으로 남아 떠나는 것들에 마음이 닿는지. 떠도는 이는 머물기를 바라고 머무는 이는 유랑을 꿈꾼다고도 해가면서. 계절이 바뀌는 동안 아침은 안개 공화국이다. 가까운 것들만 눈앞에 보일 뿐 주변은 모호해진다. 길 가 나무들은 형광빛을 내뿜으며 물기에 젖어있어도 일체 풍경이 추측 속에만 존재하는 증강현실. 어찌됐건 시간은 흐르고 햇살이 물기를 거두면 세상은 또 반짝 빛나기 시작할테니 하나님 숨결같은 안개는 선잠 속 뒤척임처럼 그러려니 두어 둘 일이려니 싶기도 하다. 안개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어떻게 당할까, 특별한 무엇 없이 안개가 특산물인 지역 무진. 청년기 불안과 시대 빈곤이 안개 모호함과 상통하는 바가 있어 주인공이 하릴없이 무진의 어둑한 골방에서 지내다 보면 다시 대처로 나가 살만하게 되더라는 이야기에서 안개는 외부욕망을 가리는 방어기제일 수도 자기 욕망조차 모호한 청년기의 유비가 될 수도 있으렷다.

그날이 그날인 일상에서는 고속도로 휴게소만 들어서도 이미 여행길이다. 이른 아침에도 모자 쓴 어른들이 하얀 마스크를 방패처럼 장착하고 커다란 관광안내지도 구조물 앞에 서성대고 있다. 김 나는 종이컵 든 이들이 그 곁을 지나쳐 가고 관광버스에서 내린 이들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기도 한다. 야외 흡연구역 몇이 서성대며 뿜어내는 담배연기가 보이는 방향에 차를 주차하고 한동안 못 보던 담배 피는 모습들을 멀찌기 바라본다. 안방에서 장죽에 담뱃잎을 넣어 태우던 할아버지, 하얀 반팔 메리야쓰를 입고 담배피던 아버지 시대는 연기처럼 흩어져 갔는지. 대학 무렵 청년들은 주머니를 뒤적여 성냥을 찾고 순한 막내아들 같은 가는 손가락을 가지런히 오므려 성냥불을 감싸 담뱃불을 붙이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들은 역설적으로 평온한 일상이었을지. 몸에 나쁘지 않다면, 구차한 냄새를 풍기지도 않는다면 어둔 저녁의 그 불빛들은 그리울만도 한지, 할아버지 아버지와 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일처럼. 연민이 일기도 할 무렵 초록이 선명한 윗도리 입은 청년이 침을 뱉으며 무심히 그 앞을 지나간다. 흡연구역을 정하고 거기서 담배 연기 뿜는 풍경도 어느 때 사라지려나, 생겨나고 머물다 사라지는 일이 늘 있고 보면, 그득하던 가을새 무리 다 날아가고 하늘도 적막해지는 때가 있는 그런 것처럼. 마스크를 쓰고 관광지도를 보고, 화장실에 단체로 들락거리고, 길 가에 모여 담배를 태우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눈물겨움이라니.

다들 돌아갔는지 하늘 가득 줄지어 날던 가을새 무리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형제는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 정작 갈대는 본 적 없는 어린 날 날아가는 새 무리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마루 끝에서 다리를 한들거리며 기러기 노래를 안마당 가득 차도록 부르던 어느 때 집으로 들어오던 아버지가 한 구절 나직이 함께 부르기도 했는지. 우리는 쑥스러이 웃기도 하고. 생명가진 것들의 작별하는 숙명, 따뜻해야만 살 수있는 기러기는 떠나야만 하려니, 절박할수록 간절해지는 이별의 슬픈 문법. 기약된 이별은 서럽고 급작스런 이별은 참혹하다.

며칠 전처럼 사소할 수 없는 시절, 안개나 가을새 풍경을 무심히 바라볼 수 없는 날들을 맞닥드렸다. 아깝고 아까운 수많은 젊음들이 길 위에서 죽었다고 한다. 민주주의 문명국에도 일어나는 일이란다. 권력은 책임지라고 부여한 공동체 재산일텐데 ‘못’ 구한 건지 ‘안’ 구한 건지도 어수선한데, 그깟 책임 백번 천번 진대도 죽음 목숨들 살릴 수는 없으니 사후 책임이라야 어차피 최소한에 불과할테다. 한데 아깝게 중단된 목숨들에 그 최소한일 책임도 진다는 권력이 없나부다. 권력은 어쩐 자만추(‘자기만족추구’의 신조어라고 한다)만 늘어진다. 참혹하고 징그럽게 반복되는 재난, 길 위에서 스러진 젊은 목숨들, 정말 아깝고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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